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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부정공>영모재중건기(永慕齋重建記)
永慕齋重建記 有區於峩嵋山下而境幽勢阻林壑明靚比屋成村者曰竹林即其卷北而雲嵐竹樹掩暎蓊篟阻烟火於咫尺挹嶔漪於顧眄者曰謙川祠寔我先祖 節愍公三世畏壘之宇也距祠一弓許有翼然新構顔之曰永慕齋以之齋宿具脩而暇以爲合族待賓授徒之所未知創自何時而歲久頹圮去年春宗議峻發任不肖以事因舊址而一新之徵諸欐文則重脩在健陵十一年而今一百七十年所可想永慕之勿替引之矣今夫祠廟之下置齋多名永慕用備不忘本樂所生之禮樂然擧是子孫之私慕也若是齋者凡有君臣父子之性者過之而孰不慕之矧乎薪火之傳弓冶之遺乎考之作室子不敢不肯堂構况先世道義風烈傳在後人者可不思所以肯之乎先子有德慕所以聿修先子有烈慕所以無忝惟先子之克肖永錫而不匱則是先子永存於千古其爲慕孰大於是凡爲苗裔於吾祖者勿以不逮之言而廢之惟薨言是擇則必能無慕乎外而慕先人所慕慕之彌永而家門昌熾不期永而萬世永賴矣是役也其始卒規畫者桢采政烈洪燮重明圭鎔諸公也程功賦事更迭董幹者在鉉在玉寬燮圭楠永輪諸宗也敢曰我從事獨賢 健陵 十一年 重修後 一百七十有一年 丁酉 春二月 壬午 後孫 琫勲 謹記 영모재중건기(永慕齋重建記) 아미산(峨嵋山) 아래에 위치하여 지경이 그윽하고 형세가 막혔으며 숲과 골짜기가 밝게 장식하여 집을 연하여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을 죽림(竹林)이라 하고 그 마을 북쪽 구름과 아지랭이가 대나무를 비쳐 우거지고 더북하여 연화(烟火)를 지척에 막고 산골 어귀에 물놀이 친 것을 끌어 돌아본 듯 하는 곳은 바로 겸천사(謙川祠)라 하는데 여기는 우리 선조 절민공(節愍公) 三세를 차례로 모셔 놓은 사당집이다. 사우로부터 활 얼마 떨어진 곳에 높이 솟은 새 집이 있어 영모재(永慕齋)라 현판하였으니 가서 치재(致齋)하고 기숙할 곳을 구비하고 그 여가로 종족 회의와 손님 대접이며 학도를 가르치는 처소로 삼았다. 어느 때에 창건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연대가 오래되어 퇴락되었으므로 지난해 봄에 宗議가 높이 일어나 불초에게 일을 맡기므로 옛 터에다 새롭게 중건하고 모든 상량문을 참조한 즉 정조(正祖) 十一년에 중수한 것으로 一백七十년의 영모(永慕)가 감쇠(減衰)하지 아니하였음을 가히 상상하겠다. 오늘날 사당 아래 재각(齋閣)을 대부분 영모란 재명을 많이 쓰는 것은 근본을 잊지 않고 소생을 즐겁게 하는 예를 갖춘 것이나 이는 모두 자손이 사사로이 추모하는 것이려니와 이 영모재는 무릇 군신 부자(君臣父子)의 천륜(天倫)을 가진 자가 지내게 되면 누가 흠모(欽慕)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신료(薪燎)의 전함과 궁야(弓冶)의 끼침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아버지가 지은 집을 자식이 감히 이어서 이룩하지 아니치 못할 것인데 하물며 선대의 도의와 풍렬(風列)이 후인에게 전하여 오는 것을 이룩할 것을 생각하지 않으리오. 선자(先子)가 덕이 있으면 스스로 닦을 바를 생각하고 선자가 열행(列行)이 있으면 욕됨이 없을 바를 생각하여 오직 선자의 어짊을 길이 전한즉 이는 선자가 천고(千古)에 길이 계신 것이니 그 생각한 것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무릇 우리 할아버지의 자손 된 자들이 내 말을 미치지 못한다 하여 폐하지 말고 하찮은 초동목수(樵童牧竪)의 말이라 할지라도 가려 쓰듯 한다면 반드시 다른 외부의 것을 사모하지 말고 선인의 생각한 바를 추모한다면 생각이 길이 뻗어 가문의 창성을 길이 기약하지 않아도 만세에 길이 힘입을 것이다. 이 역사를 시종 계획한 자는 정채(楨采), 정렬(政烈), 홍섭(洪燮), 중명(重明), 규용(圭鎔) 제공이요, 공정을 헤아려 일을 맡기며 서로 교대하여 감독한 자는 재현(在鉉), 재옥(在玉), 관섭(寬燮), 규남(圭楠), 영륜(永輪) 제종이었다. 어찌 감히 나 홀로 일을 보았다 하겠는가. 後孫 琫勲 삼가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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